채찍과 당근
나는 프랑스어를 얇고 길게, 간헐적이면서도 꾸준히 공부한다. 한 1년 정도 완전히 잊고 살았다가도 다시 불이 붙어 몇 달간 열심히 공부하기도 하고 그랬다가 또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과정의 반복이다. 벌써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한지 4년은 된 것 같은데 기초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10년 넘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당연하게도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나요?"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연구해보고 학생들의 진척을 관찰해보면서 몇 가지 개념을 수립하게 되었는데 전체적인 언어 학습의 큰 뿌리가 되면서 동시에 가장 효과적인(내가 생각하기에) 요소는 '동기 부여(Motivation)'이다.
방법이 아닌 요소라고 칭한 이유는 학습 방법은 셀 수 없이 너무 많고 사람마다 효과적인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무엇 하나가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언어 학습을 이어나가는데에 필요한 요소들 안에서 무엇이 효과적인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Motivation 안에는 애정, 끈기, 노력, 시간과 돈의 투자 등 어학 학습에 필요한 기타 모든 것이 들어있다. 동기 부여 없이 목적만 있는 학습은 결코 지속되지 못하고 설령 외부 압력에 의해 지속된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과 맛은 모두 뺀, 명을 유지하기 위해 섭취해야하는 무미하고 텁텁한 빵일 뿐이다.
우리나라 교육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교육의 결과가 바로 이 '동기 부여 없는 목적'이다. 그래서 영어는 한국인들에게 해소할 수 없는 불만이자 고통 속에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채찍인 동시에 어느 정도 요구되는 수준을 달성했을 때에는 보상이 따라오는 당근이기도 하다.
목적을 위한 목적
물론 동기 부여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동기 없이, 그저 시키는대로 공부해서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잘하는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지않을만큼 많다. 연세대 대학원에서 영문학를 전공한 언니가 동기들 중에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주눅들 때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하루는 동기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외국에서 산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하냐고.
"어릴 때 영어유치원 다니며 배웠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삼성에서 수업을 할 때 만났던 학생 한 명도 영어를 꽤 유창하게 하길래 해외 생활 경험이 있냐고 물었더니 "외국어 고등학교를 나와서 그런 것 같다'라고 했다.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이런 결과에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언어의 학습과 활용 능력 역시 계급을 드러내는 척도인가. 필요에 의해 수십년간 꾸역꾸역 하는 공부는 역시 영어 유치원과 외중, 외고를 이길 수 없는 것인가. 내 유치원 시절은 이미 흔적 없이 지나갔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난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유치원 시절이란 없지만) 한 달에 수백 만원씩 하는 대치동 학원보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공부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굳게 믿었던 지난 날들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사실 이런 배신감을 이 때 처음 맛본 건 아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때에도 빈부격차에 따라 명확히 드러나는 실력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강남에 새로 지은 고층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의 영어 실력과 다닥다닥 붙어 빛도 들어오지 않는 다세대주택에 사는 아이들의 영어 실력은 비교할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자비로운 햇볕이 주는 따스함도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은 공부도 하지 말라는 법인가?!
물론 아니다. 한달에 많게는 몇 백만원씩 하는 대치동 학원이나 영어 유치원에 갈 수 없다면 다른 방법으로 공부하면 된다. 내가 학생들에게 좋아하는 문화활동으로부터 언어 학습의 효과까지 누리라고 끝없이 당부하고 강요하는 이유다.
이 때에 맞춰 다시 등장해야하는 적절한 단어가 바로 '동기 부여'이다. 학원비와 맞바꾼 억지로 한 공부가 그만큼 효과가 있다면 돈은 별로 쓰지 않았지만 하고싶어서 한 공부 역시 비슷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목적을 위한 목적(Objective for objective's sake)'가 아닌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는 학습 방법은 반드시 결실을 낸다.
간헐적이지만 연속적인 공부의 근거와 목표
바로 이 장대한 서론이 내가 독학으로 하는 어학 학습의 효과를 나 자신에게 실험해보고자 결단한 이유이다. 내가 학생들에게 닳고 닳도록 강조한 이 '문화를 통한 언어 학습'의 효과를 내가 직접 프랑스어를 혼자 공부함으로써 확인해보려 한다. 분명 시간은 오래 걸릴 것이다. 하지만 언젠간 해석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어느 정도는 자동으로 해석되는 날이 분명 올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대하는 것과 내가 프랑스어를 대하는 태도와 시작 단계에는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공통점은 기본 단어, 문법, 간단한 표현 등은 알지만 막상 그 단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긴 문장으로 이어지면 이해도가 급감한다는 것과 대충 알아듣기는 하는 것 같은데 막상 말을 하려고 하면 입안에 솜을 가득 문듯 말문이 막힌다는 것,
어디가서 영어/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못한다고 하기도 애매한(못하는 쪽에 더 가깝지만) 무한한 시간에 갇혀있다는 것, 하지만 자발적으로나 강제적으로 계속 해야하긴 하기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 늘어놓고 보니 공통점이 꽤 많다.
차이점은 영어 자체를 진심으로 미워하는 다수와 달리 나는 프랑스어를 단순히 '좋아하기 때문에' 놓지 않는다는 것, 영어를 듣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프랑스어를 듣기만 해도 마음이 평온해진다는 것, 언어 학습을 위해 한국 예능과 드라마를 간신히 포기하고 억지로 영어로 된 콘텐츠를 보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프랑스 영화와 문학에 푹 빠져있다는 것! 이렇게 보니 나에겐 프랑스어를 공부할 이유도 충분하고 남들지 갖지 못한 장점도 많다. 의욕이 한 단계 상승했다.
내가 프랑스어를 원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학생들이 하기 원하는 영어 수준인, 해외여행지에서 주문할 때, 길 찾을 때, 간단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회화실력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지를 알아보고 싶다.
문화와 예술을 가장 간편하고 대중적인 방법으로 접할 수 있게 해주는 미디어인 영화와 책을 활용해(독서 자체를 싫어하는 학생들이 꽤 많았음으로 나 역시 책보다는 영화를 활용할 것이다) 일상에서 쓰이는 단어, 표현을 익히고 리스닝까지 학습해보려 한다.
스트리밍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프랑스 영화는 한글 자막밖에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리스닝을 통한 딕테이션은 온전히 내 귀에만 의존해야한다는 점이 부담되긴 하지만 이는 리스닝 스킬을 강화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이기도 하기에 큰 장점이 될 수도 있다. 나의 프랑스어 리스닝 수준은 한국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의 수준과 비슷하기에 이 실험에 신빙성을 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공부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스피킹은? 스피킹은 별개의 문제이다. 문법을 정복하고 영단어를 달달 외운다고 해서 말까지 술술할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를 보낸 윗세대 어른들이 아직도 일본어 단어는 기억하고 어느정도 읽고 해석은 할 수 있지만 회화는 할 수 없는 이유, 많은 젊은이들이 운전면허증처럼 보유한 토익 900점이 회화로 연결되지 않는 이유와 같다.
스피킹은 언어 중 익히기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다. 언어의 다른 부분은 흡수하는 것이지만 스피킹은 내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섭취한 음식이 있어야 배설하고 입력이 있어야 출력이 있듯, 공부하고 외운 데이터베이스가 있어야 입으로 말할 게 있다. 스피킹보다 리스닝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공부 방법
1. 시간 날 때, 또는 생각날 때 부담 없이 프랑스 영화를 시청한다.
2. 영화 내에서 사용된(새롭게 배운, 또는 이미 알지만 아직 익숙하진 않은) 문장(또는 단어 및 표현)을 최소 10개 이상 받아 적는다.
3. 받아 적은 문장을 배우와 똑같은 속도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소리내어 읽는다.
4. 간간히 이전에 사둔 프랑스어 학습서를 공부한다.(양을 정해두지 않는 이유는 너무 큰 부담이 되어 아예 포기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딱 이 네 가지만 꾸준히 수행한다. 데드라인도 없고 따야하는 성적도 없다. 제일 중요한 건 포기해하지 않는 것. 어느 정도 프랑스어가 내 안에서 자리 잡았다는 생각이 들면 프랑스어 원서로 된 책을 쉬운 것부터 읽기 시작해 궁극적으로는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잡았던 원대한 목표인 카뮈의 <이방인>을 원서로 읽게 되는 날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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