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딱 세 번째 읽었다. 그래도 부족하다. C.S 루이스였던가. 책을 한 번만 읽어놓고 그 책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했던 사람이.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좋은 책은 곱씹고 반복해서 음미할수록 깨달음이 깊어진다. 이 책은 특히 내가 더욱 아끼고 좋아하는 소설인데 헉슬리의 비유와 풍자가 보는 내내 전율과 냉소를 동시에 주기 때문이다.
20대에 읽었던 멋진 신세계에서 존은 융통성 없는 혈기왕성하며 극단적인 야만인, 버나드는 사회에 반항하는 깨어있는 문명인, 레니나는 그저 멍청하고 포동포동한 고기같은 육체를 가진 여자에 불과했다. 30대에 읽은 멋진 신세계에서 존은 구원을 간절히 바라던, 순수함 그 자체였고 버나드는 진리와 가식 사이에서 허우덕대다 결국 안락함을 위해 진리를 포기한 나약한 인간, 레니나는 문명 저 너머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며 갈망했지만 처절한 좌절을 맛본 인간이었다.
소설의 배경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가공되고 가꾸어진 미래의 런던으로 모든 인간은 병에서 배양되어 조건반사 교육을 받으며 사회에 완벽하게 적응하도록 만들어진다. 각기 다른 계급 별로 자신들의 미래 직업에 맞는 교육을 태어나기 전부터 받기 때문에 본인들에게 주어진 직업이나 환경에 불만을 가진다거나 다른 사람의 삶을 부러워할 수 없도록 세뇌된다. 충분히 유토피아적인 설정이다.
책과 요란한 소리, 꽃과 전류 쇼크-이미 유아의 의식 속에는 이 조합이 멋지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훈련을 2백 번 반복하면 양자의 결합은 도저히 분리할 수 없이 견고한 개념이 될 것이다. 인간이 결합시킨 것은 아무리 자연이라 할지라도 분리시킬 수 없다.
카키색 옷을 입는 델타계급 아기들이 받는 조건반사 교육 중 하나다. 책과 꽃에 자연스러운 거부 반응을 보이도록 소음과 전류를 이용해 교육된다. 문학과 자연의 힘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책과 꽃을 거부함으로써 생각하고 사색할 기회를 박탈당하지만 그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들이 얼마나 큰 부분을 빼앗겼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다. 이 모습을 지켜 본 학생 하나가 “하층계급의 인간이 독서로 인하여 세계국가의 시간을 낭비한다든가, 해로운 독서를 함으로써 그들의 조건반사 작용을 약화시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고 한다”로 말한다. 독서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를 심어주기에 사회의 일원이 하는 행동으로는 적합하지 않게 여겨진다.
문학과 자연을 박탈당한 대신 쾌락이 주어진다. 쾌락은 원하는때에 원하는만큼 아무런 댓가 없이 주어진다.
“쾌락으로부터 벗어날 여가가 없으며 잠시도 앉아서 생각할 시간이 없어졌지. 또한 불행히도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무의미한 시간의 터널이 입을 벌린다면 항상 소마가 대기하고 있는거야”.
소마는 가벼운 환각 효과를 주는 알약으로 술이나 마약과 그 효과는 비슷하나 부작용이나 신체적인 불편함이 전혀 없는 신개념 약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실제 소마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현실의 모든 혼란과 슬픔을 아무런 불쾌함없이 잊게 해주는 그런 약. 나는 미디어가 현시대의 소마라고 생각한다.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콘텐츠들이 사고할 수 있는 틈을 주지 않는다. 쾌락활동과 소마 복용은 생각뿐 아니라 고통 역시 잊게 한다.
소마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내적인 힘에 의존한 채 어떤 크나큰 시련이나 고통이나 어떤 박해에 직면한다면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하고 버나드는 전에 여러 번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그는 심지어 고통을 동경한 적이 있었다.
고통 없는 삶이란 표면적으로는 완전한 행복이 성립된 상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상태이다.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에서 의견을 빌려오자면 일단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로써 고통이 아예 없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들은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그 행동과 선택에는 반드시 고통이 수반된다. 그래서 멋진 신세계에서는 고통이라는 존재를 느낄 수도 없게 소마로 고통이 오기 전에 미리 그 대상을 제거한다. 고통을 인위적으로 없앤다는 것은 즉 자유의지를 없애는 것과 같다.
헉슬리는 소설에서 '문명인' 또는 '문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겉으로 보이는 문명은 화려하고 편리하며 환상적이지만 인간을 무능력, 무기력, 무지하게 만드는 공신이다. 그 문명을 지키기 위해 문명인들은 예술과 과학, 그리고 종교를 희생한다. <멋진 신세계>가 시대를 초월한 뛰어난 작품인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이유는 1932년에 집필된 이 소설이 2019년 현재를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시대 대다수의 인간들에게 개인적인 고통을 제외하고 문명의 발전으로 삶이 안락하고 편리한건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의 뇌는 그 삶보다 더 안락하다. 생각하고 고뇌할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에 그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고 외부에서 떠먹여주는 것들만 받아먹고 있다. 미디어는 화려하고 어디에나 널려있기에 잠깐의 유흥과 오락이 삶의 고된 순간을 잊게 해주고 다시 텅빈 상태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활동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질서 역시 부정적으로 사용된다. 책 속 문명화된 런던은 그 어디보다 질서정연하다. 질서는 곧 안정을 의미하지만 안정 속에선 예술이 나올 수 없다. 불안정과 불안함 안에서 예술의 혼이 불타오른다.
“사회의 불안정이 없이는 비극을 만들 수 없는 것이야.” “우리는 행복과 소위 말하는 고도의 예술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돼. 우리는 고도의 예술을 희생시킨 셈이지.” “행복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예술뿐만이 아니야. 과학도 마찬가지야. 과학은 위험한 것이야. 우리는 그것을 용이주도하게 묶어 놓고 재갈을 물려 놓아야 해.”
저명한 과학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헉슬리는 과학에 있어서도 해박한 지식을 보여준다. 예술과 과학, 이 인간의 기본 권리를 희생한 후 마지막으로 희생하는 것은 종교다.
“신은 기계나 발달된 의약품이나 보편적 행복과는 양립할수 없는 걸세.”
책 전체에 걸쳐 헉슬리는 종교와 신을 탐구하고 또 갈구하는 듯하다. 본인이 진심으로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을 찾을 이유가 없다. 신이 없이도 이미 삶은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아지가 주인을 찾듯 결핍을 느끼는 사람은 죽기전까지 신을 찾는다. 그렇게 신을 부정했던 프로이트도 일생동안 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이유다. 소설 속 존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신의 은총을 부르짖는다.
<멋진 신세계>에서 강조되는 진리는 바로 인문학이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야만인 존은 셰익스피어의 입을 통해 본인의 생각을 표현한다. 책 전체에 걸쳐 셰익스피어가 인용되는데 셰익스피어를 향한 헉슬리의 사랑과 애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가 얼마나 그를 증오하는지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그를 증오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는 어휘가 있었다. 북소리와 같고 노래와 마법과도 같은 이러한 어휘가 있었다.
예술가들이 더 독서를 소홀히하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술가는 표현하는 사람이다.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바를 적절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예술을 할 수 없다. 어휘가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듯이 독서가 주는 경험이 있어야 인간 세계를 작품으로 창조해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멋진 신세계를 '비인간적 기계문명의 횡포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셰익스피어로 대변되는 인문학정신'이라고 소개했다. 인간이 기계처럼 되어가고 기계가 인간을 넘어서고 있는 지금 세상에서 우리에게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디스토피아인가 유토피아인가. 알 수 없다.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멋진 신세계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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